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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낭만에 빠져봅니다

 

우리는 단 몇초의 시간동안 자극적인 내용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영상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진지 오래라,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쓰여진 '시'를 읽어본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른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시집을 읽는다니? 어색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낭만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으쓱해지기도 한다. 

 

어린시절 시를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물론 국어 교과서에서 접한 게 대부분이지만, 20여년이 흐른 지금도 시 구절들이 떠오른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는 타인과의 관계가 불어넣어주는 생명력을 느꼈는데, 어쩜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을까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시의 매력은 복잡다양하고 미묘한 생각과 감정을 풀어내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시인은, 어떤 표현이 적합할지 고심하여 한 단어 한 단어 꾹꾹 눌러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넘치지 않게 빚어낸 후 곱게 포장하는 작업을 거치는게 아닐까. 누군가 정성스럽게 빚은 글을 보는 기분이라 시를 접할 때면 몽글몽글한 감정이 들기도 하고, 벅차기도 한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시집에서 느껴진 시인의 시는 그립고, 쓸쓸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담담하게 절제하여 표현했다. 마음에 와 닿아 접어둔 페이지들이 몇 개 있는데, 이 서평에 남기고 싶은 시는 '나의 마음'이다. 기쁘다가도 한 순간에 무너지고, 불안하다가도 깔깔 거리는 '알 수 없는 나'를 들킨 것만 같았던 시. 삶의 암호를 이해한 것 같았다가 때로는 암호 그 자체인 나의 마음.

 

 

나의 마음

봄날처럼 다정했다가 뼈를 부수는 서리처럼 냉정하고
무한허공처럼 넓었다가 토끼굴처럼 속 좁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다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부자유하고
꽃 피는 소리 들릴 만큼 고요했다가 벌집처럼 소란하고 
목화솜처럼 부드러웠다가 호랑가시나무처럼 날카롭고
무슨일에도 무심했다가 사소한 일에 감정 과잉이고
오체투지 수행자처럼 인내심 많았다가 극의 방향을 잃은 나침반처럼 초조하고
속수무책으로 매혹되었다가 속절없이 환멸에 젖고
민들레 풀씨처럼 놓아주었다가 도깨비바늘처럼 달라붙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가슴 뭉클했다가 반나절만에 안색을 바꾸고
거리의 상점처럼 열려있다가 봉쇄수도원의 덧문처럼 닫히고
새로 핀 분꽃처럼 희망찼다가 구겨진 포장지처럼 근심으로 얼룩지고
시냇물처럼 재잘거리다가 무너진 흙처럼 시무룩하고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잊게 했다가
한 개의 슬픔이 천 개의 기쁨을 잊게 하고
반딧불이의 꼬리처럼 환했다가 반딧불이의 얼굴처럼 어둡고
모두가 나였다가 누구나 타인이고
그래서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가 무조건적인 미움이고
그래서 더 바랄게 없는 천국이었다가 혼자만의 지옥이고
삶의 암호를 이해한 것 같았다가 때로는 암호 그 자체인
나의 마음

 


 

어찌보면, 내가 출퇴근 길을 함께하는 음악도 큰 틀에서는 시가 아닐까 싶다. 작사가가 표현하고 싶은 주제를 음표에 얹어 써낸 한편의 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늘 밤에는 서정적인 음악을 들으면서 잠에 들어야겠다.

 

서른을 훌쩍 넘었지만.. 김광석님의 서른즈음에를.. !